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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힘] 정신이 바로서야 나라가 산다

컨설턴트 박태건 2005. 9. 14. 01:31
 
정신이 바로서야 나라가 산다

 

 

         내고향 밀양에는 표중비(일명 사명대사비)가 있다
          (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나리)
 

 
 
표충비의 땀 흘리는 장면.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미리 예고라도 하듯 땀 흘리는 신비의 비석.
어떤 이는 사명대사의 신통력 때문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이는 자연현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사명대사의 영험이 곳곳에 밴 밀양을 찾아 신비를 벗겨 보았더니….》

<홍제사 사명비각 한출(汗出) 동향>
1997. 3. 6 12:00~17:00 32리터 한보사태, 국회파행, 개각 등 국가위기 우려

1997.2. 25 17:00~20:00 3리터 김영삼대통령 취임4주년 특별담화, 한보부도사태, 황장엽비서 망명, 이한영 피습 등 국가적 위기 상황 우려

1996. 11. 5 13:00~22:00 강릉 잠수함 사건과 무장공비 침입

1996. 1. 14 13:00~17:00 2되 전직대통령 2인 구속, 15대 총선관련 선거비용 (이하 생략)

 

핏보면 독재정권 시절 민간인 사찰을 연상시키는 듯한 위 보고서는 밀양경찰서가 홍제사 표충비(일명 사명대사 비;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소재)가 사람 몸처럼 땀을 흘리는 「이상한」 현상을 기록, 상부로 보고하는 문건 중 일부다. 날짜 옆의 숫자는 표충비가 땀을 흘린 시간을 기록한 것이고 그 옆은 흘린 양을 표시한 것이다.

이 보고서는 표충비각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는 파출소 직원들이 땀 흘리는 상황을 파악해 밀양경찰서에 보고하면, 본서 정보과에서 이와 관련한 민심 동향을 덧붙인 후 「더 높은 곳」으로 제출된다.

밀양경찰서의 정보관계자는 「표충비 한출(汗出) 동향」은 역대정권은 물론 김영삼 정권에서도 여전히 「청와대 직보 사항」이라고 귀띔한다. 즉 우리나라 최고 권력층에서도 표충비의 땀 흘리는 현상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비석에서 땀이 나는 것 자체가 희한한 일일 뿐더러 그것을 권력층에서 민심과 연결시켜 예민하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이 땀 흘리는 비석은 비단 권력층의 관심사만은 아닌 듯하다. 관내에서 「요시찰 대상 1호」로 표충비를 관찰하는 파출소 邊一秀(변일수) 소장은 『나라에 사건 사고 등 변고가 생기거나 데모 등 큰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면 으레 표충비가 땀을 흘리지 않느냐는 일반인들의 전화 문의가 심심찮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비석에서 땀을 흘리는 것과 나라 돌아가는 사정을 연결시켜보는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표충비는 1894년 갑오 동학혁명 7일 전에 3말1되 분량의 땀을 흘린 이후 줄곧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생길 때마다 어김없이 땀을 흘려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묘하게도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기 며칠 전에 표충비는 미리 예고하라도 하듯 땀을 내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평균 1년에 두세 차례 정도 땀을 내는 표충비는 97년에 들어서는 벌써 두 번이나 땀을 흘림으로써 노동법개정과 한보사건 등으로 야기된 현재의 국가적 위난을 암시했다고도 한다.

 

사명대사의 신통력인가

높이 2.76m, 폭 97cm, 두께 55cm 의 웅장한 크기에 오석(烏石)이라 불리는 석재로 세워진 표충비(表忠碑). 비석 4면에 사명대사와 그 스승인 서산대사의 비명 등이 새겨져 있어 「사명대사비」라고도 불린다. 이 때문에 표충비 소재지인 무안리 주민들은 비석에서 땀이 나는 현상을 두고 사명대사의 영검이 깃들여 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 다.

그래서 그런지 표충비는 여느 비석과는 다른 「대우」를 받고 있다. 비각 앞에는 촛대와 향로가 설치돼 있는데 참배객들이 찾아와 향을 사르고 비석에 예를 갖추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밀양사람들은 아예 밀양 출신의 사명대사를 「밀양의 수호신」으로 여기는 경향도 보인다. 밀양에서 매년 벌어지는 전통 축제인 「아랑제」 행사는 표충비 비각 에서 점화식을 가짐으로써 시작되고, 무안면의 줄다리기와 용호놀이도 반드시 표충비에서 제를 드린 다음 행사가 거행된다. 또 사명대사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무안면 고라리에는 현재 대규모 사명대사 유적지 성역화 사업이 벌어지고 있고, 이곳 마을 초등학교에는 사명대사 동상이 학교의 상징물처럼 우뚝 서 있다.

임진왜란때 전쟁 외교를 통해 왜장을 골탕먹이고 박살낸 스님으로서 민족의 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사명대사가 적어도 밀양에서만큼은 생생히 살아 숨쉬고 있는 셈이다.

한편 역사적으로 사명대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존재가 바로 일본이다. 지난 96년 1월14일 표충비가 땀을 흘렸을 때 마을 주민들은 이를 일본과 연결시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정부는 종전과는 다르게 매우 노골적으로 우리나라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함으로써 한국인들의 분노를 샀는데, 마을 사람들은 사명대사가 진노해 표충비가 땀을 흘린다고 해석했던 것.

이러한 정서는 멀리 구한말 시대까지 올라간다. 1905년 일본의 간계로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지자 조선 팔도에서는 『오경(五庚) 후에 홍제존자(사명대사)가 통곡을 한다』는 참언이 번져나갔다. 이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일제의 강제 병탄이 있었던 경술년(庚戌年;1910년) 국치를 앞두고 해인사 안에 있는 사명대사비(홍제사 표충비와는 다름)가 밤새워 울었던 것이다.

사명대사 다비처(임종한 곳)에 세워진 이 비석의 정식 이름은 「자통(玆通) 홍제존자(弘濟尊者) 사명대사 석장비」다. 멀리서 들으면 곡소리가 나나 가까이 가면 들리지 않다가 다시 멀어지면 곡소리가 나곤 했다는 신비의 비석이다. 비문에는 사명대사가 입적한 해가 광해군 2년(1610년) 경술년이었는데 1910년 경술 국치의 3백년 전, 그러니까 경술 년이 5번 지난 5경술 후에 비석의 울음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후 패세가 짙어가던 1943년에도 이 해인사 사명대사비가 울었고, 그 통곡 소문은 삽시간에 팔도에 번져나갔다. 이것은 일본이 곧 패망하고 조국이 광복된다는 희망을 조선 민중들에게 안겨주었다. 그러자 이에 당황한 합천경찰서가 사명대사비를 4토막내 버림으로써 「신비한 비석」은 사라져버렸던 것. 소문에 의하면 당시 비석을 깨뜨린 사람들은 사명대사의 벌을 받아 모두 사망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표충비 기를 꺾어라!

합천 해인사의 사명대사비가 울음소리를 냈다는 것은 밀양 홍제사의 표충비가 땀을 흘린다는 것에 더욱 신비감을 부여해준다. 그리고 이들 비석 모두 도술이 높기로 유명했 던 사명대사를 기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사람들, 특히 불자들은 「사명대사라면 능히 그럴 수 있는 현상」이라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그것이 바로 민심이 돼 당대의 권력 지배층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홍제사 표충비도 해인사 사명대사비처럼 수난의 세월을 겪어왔다. 일제시절 경술국치와 3·1운동 등 한민족의 운명과 관련이 깊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땀을 흘린 표충비가 일본인들에게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표충비는 해인사에 있던 비석처럼 깨뜨려지는 비극은 겪지 않았다.

대신 일본인들은 표충비의 「기」를 꺾기 위해 풍수적 논리까지 도입했다고 무안리 마을의 촌로들은 증언한다. 진등산의 정기가 내려와 뭉쳐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표충비 바로 뒤쪽 땅밑에 일본은 엉청난 규모의 철근을 꽂아놓고 그 위에다 담배창고를 건설했다는 것. 철근이나 독한 냄새가 나는 담배는 모두 맥을 끊기 위한 수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은 사명대사 비석 주위로 일본인 관사와 지서(현 파출소)를 설치해 「비석의 기」를 차단하는 한편 비석 앞쪽에 있던 연못을 메워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같은 만행 때문에 이곳에 살던 일본인들 역시 그 벌을 받았다고 한다. 마을 경로당에서 만난 한 촌로는 『일제때 부자, 선생, 상인 등 일본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았는데 여기서 아들은커녕 딸 자식 낳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서, 비를 훼손시킨 데 대한 사명대사의 응징으로 풀이한다.

사실 밀양 일대는 사명대사의 영험한 전설이 구석구석 밴 곳이기도 하다. 표충비에서 8km 정도 떨어진 영취산 대법사(밀양시 중산리)에는 사명대사가 50살 때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아 놓은 것이 자라나 잎을 피웠다는 아름드리 모과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높이가 2m20cm, 굵기는 3m20cm로 나무 밑둥은 어른 두 사람이 양팔을 벌려야 마주 잡을 정도로 우람하다.

이 절은 사명대사가 임종하기 전 10여년간 머물렀던 곳이기도 한데, 임종 후 그 영정을 모신 곳이라 해서 조정에서 표충사(表忠詞)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가 후에 영정이 단장 면의 현 표충사로 모셔지는 바람에 원래의 이름을 뺏기고 말았다 한다.

그런데 이 절에서 28년간 주지로 재임해온 지혜스님은 이 지팡이 나무를 통해 사명대사의 호령을 들었다는 이상한 얘기를 한다. 지혜스님이 6년 전에 겪었던 일은 이러하다.

해발 6백m 고지의 좁은 터에 자리잡고 있는 이 절은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도 법당이 너무 협소하다. 게다가 사명대사의 지팡이 나무라고 알려진 모과나무(지혜스님은 사명대사가 심은 나무일 것이라고 말함)가 떡 법당 바로 앞을 가로막고 있어 보기에 더욱 안쓰럽다. 법당을 넓히려면 모과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나무 옮기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지혜스님은 공사일정을 짰다. 그런데 인부들이 일하러 오기로 한 전날 밤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요사채에서 잠을 자던 지혜스님은 갑자기 산천이 울리는 듯한 소리에 눈을 떴다. 적막하기만 한 산중에 웬 비행기가 추락했나 싶을 정도로 요란해 밖에 나가보았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방에 들어와 잠을 청하려는데 이번에는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4백년을 지켰는데 네 마음대로 하려느냐. 나는 절대 안간다』

지혜스님은 등골이 싸늘해졌다. 목소리는 분명 모과나무쪽에서 들려왔다. 후닥닥 밖으로 나가보았다. 8월 한여름철인데 모과나무에서 아주 차가운 바람이 씨익--불어왔다. 다음날 새벽 6시 지혜스님은 공사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나무 옮기는 일을 취소시켰다.

이같은 이야기가 한 스님의 개인적인 신비체험일 뿐이라고 무시해버리기에는 현재의 대법사 구조가 참으로 이상하다. 원래의 협소한 법당과 모과나무는 그대로 놔둔 채, 법 당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른쪽으로 비킨 공터에 새 법당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수십억원을 들여 대규모 공사를 하면서 본존불을 모시는 법당을 중심에서 멀어 진 곳에다 짓는, 즉 사찰 건축 상식에서 크게 어긋나는 공사를 하는 것은 사명대사의 힘이 작용했다고밖에 달리 설명하기가 궁색하다.

 

사람 땀과 비슷한 표충비 땀

사명대사의 영험이 현재의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확실히 표충비가 땀 흘리는 현상에도 사명대사의 신통력이 개입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공한다. 표충비 인근의 마을 주민들은 땀 흘리는 현상이 현재의 과학적 상식으로 풀리지 않는다는 근거를 몇가지 제시한다.

▲표충비 땀은 사람 몸에서 땀이 나는 것처럼 비석 사면에서 퐁퐁 올라온다. 또 그 땀을 맛보면 약간 짠맛이 느껴질 정도로 사람 땀과 흡사한데, 이는 보통 물이 아니라는 증거다.

▲표충비 땀이 습기 등 기후에 의한 자연 현상이라고 한다면, 왜 습기를 가득 머금은 장마철에는 한번도 땀을 흘리지 않았는가.

▲설령 기후에 의한 자연현상으로 땀을 흘린다 쳐도 비석에 깊게 새겨진 글자속으로는 흐르지 않는다. 세로 방향으로 새겨진 한자들 사이, 즉 표면이 매끈한 곳을 골라 흐른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물이란 것은 움푹한 곳으로 흘러드는 것이 상식인데 표충비 땀은 그렇지 않다.

▲표충비를 보호하는 비각 기둥은 물론 바로 10m 떨어진 곳에 크기가 비석한 홍제사 사적비에서는 같은 조건에서도 전혀 땀이 나지 않는다. 또 전국에서 표충비처럼 땀 흘린다는 비석은 아직 없지 않은가.

이쯤에서 본격적으로 표충비의 땀 흘리는 현상을 분석해보기로 하자. 몇해 전 밀양시 보건소에서는 표충비의 땀을 채취, 경남보건환경연구원에 성분 분석을 의뢰한 바 있다. 분석 결과 표충비 땀은 몇가지 중금속과 함께 인체의 땀과 비슷한 염소성분(염분)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당시 이 실험에 참여한 바 있는 보건소의 이금희씨는 『주 민들이 표충사 땀에서 짭짤한 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염소 성분 때문이고, 표충비 석재 자체에서도 염소성분이 검출된 걸로 안다』고 말했다.

표충석비의 재질과 관련해 부산대 金恒默(김항묵)교수(지질학)는 최근 표충비각 탐사에서 흥미로운 실험결과를 발표했다. 김교수는 오석이라 불리는 표충비는 철분이 다량 함유된 염기성 화성암인 휘록암으로 쉽게 차가워지는 성질이 있어 다습(多濕)한 공기 등이 불어올 경우 다른 재질보다 이슬이 잘 맺히는 특성이 있음을 밝혀냈다. 더욱이 비 석은 표면이 거울처럼 매끈매끈해 표면장력 때문에 한번 맺힌 이슬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 특성 또한 갖추고 있다고 했다. 반면 표충비를 보호하는 비각의 기둥에서 땀이 흐르지 않은 것은 그 재질이 산성 용회암으로 쉽게 차가워지지 않아 이슬맺기가 힘들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말하자면 표충비는 그 재질 자체가 땀을 잘 낼 수 있는 「필요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

 

과학의 도전

그렇다면 표충비에 땀을 내게 하는 외부적 「충분조건」도 필요하게 마련이다. 먼저 표충비의 유래를 살펴보자. 기록에 의하면 표충비는 1738년(영조 14년) 사명대사를 기리기 위해 그의 법손인 남붕(南鵬)이 경산(慶山;경주의 산)에서 채취한 돌로 4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또 단장면 표충사에 보관돼 있는 「사명당 비각 이전 서문」에 의하면 조선조 말 부산진에 있던 비를 밀양으로 이전해 왔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조 말이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부산에 있던 비석을 밀양으로 옮겨왔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기록에 따르면 표충비가 맨처음으로 땀을 낸 것 은 1894년 동학혁명 때 일이다. 그러니까 1738년에 조성된 이후 1백50여년간은 표충비가 땀을 흘렸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이는 조선조 왕조가 후기에 접어들면서 국가적 위기가 없었을 리 없건만 이 기간에는 표충비가 어떠한 영험도 드러내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밀양으로 옮겨왔을 무렵으로 추정되는 조선조말, 즉 1890년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땀을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국 밀양의 무안면이라는 특수한 지형 자체가 표충비가 땀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김교수는 이를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한다.

『이슬이 맺히는 결로(結露) 현상은 통풍이 불량한 분지형에서 잘 발생한다. 즉 비오기 전이나 안개가 낀 날 등 습도가 높은 공기가 불어와 차가운 것에 부딪히면 이슬을 맺게 되는데, 통풍이 여의치 않은 곳에서는 이슬이 제대로 증발되지 않기 때문에 물이 돼 흐르는 현상이 생긴다』

그의 말마따나 무안면은 분지형의 지세를 갖추고 있어 표충비가 땀을 낼 수 있는 충분조건을 갖추었다. 그렇다면 필요와 충분 조건이 구비된 상태에서 실제로 표충비는 어떻 게 땀을 낼 수 있을까. 부산대 黃水鎭(황수진) 교수(기상학)는 간단한 실험을 통해서 비석의 결로 현상을 재현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비석의 결로현상은 습기를 머금은 따뜻한 공기가 비석에 닿아 차가워지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 기상학에서는 공기 속에 포함된 수증기의 양을 표시하는 수치로 「비습」( 1kg의 공기속에 포함된 수증기의 g수)이란 용어를 쓰는데 온도가 높아질수록 포화비습(1kg의 공기가 최대한 머금을 수 있는 수증기 양)의 수치가 올라가고, 온도가 내려가면 포화비습의 수치 역시 낮아진다. 따라서 높은 온도에서 수증기를 머금은 공기를 강제로 낮은 온도로 만들면 그 차이만큼 수증기를 밖으로 배출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실험실에서 비석의 온도가 섭씨 20도이고 주변 공기 역시 섭씨 20도에 습도를 90%(비가 내릴 가능성이 높은 수준)로 갖추어놓았다 치자. 이때는 비석과 공기의 온도차가 없으므로 결로현상이 생기지 않는다. 습도가 높은 장마철에 비석이 땀을 내지 않는 것은 이처럼 주변의 온도와 비석의 온도가 그다지 차이가 없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공기중의 온도와 습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섭씨 20도에 습도90%) 비석의 온도만 섭씨 5도로 낮추면 비석에 이슬이 맺히게 된다. 그 이슬 양은 섭씨 20도에서 머금은 수증기양과 섭씨 5도에서 최대로 머금을 수 있는 수증기 양을 뺀 나머지다』

적어도 두 교수의 실험에 의하면 표충비에서 땀 흘리는 현상은 매우 과학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왜 유독 표충비에서만 결로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지, 그리고 하필이면 국가적 중대사건이 발생하는 시점에 맞추어 땀을 흘리게 되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이에 대해 김항묵교수는 『그것은 과학 밖의 문제』라면서 『사명대사와 같은 고승의 영적이며 초자연적인 힘을 무조건 무시할 수만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수께끼는 여전히

무대를 잠시 밀양의 표충비에서 전북 완주의 송광사로 옮겨보자. 밀양의 표충비 못지않게 호국불교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송광사는 모시고 있는 불상에서 나라에 중요한 고 비가 있을 때마다 역시 땀을 흘리는 것으로 세간에 소문나 있는 곳이다. 최근에도 불상이 땀을 흘렸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해서 흔적이 없어지기 전에 서둘러 가보기로 했다.

밀양의 표충비가 임진왜란과 관계돼 있다면 송광사는 병자호란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조선조 중기 1620년에 인조대왕이 불력(佛力)을 빌려 외침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 고, 병자호란때 중국 심양에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귀환을 빌기 위해 중창불사를 한 전형적인 호국사찰이기 때문. 그리고 바로 이 절의 본당인 대웅전 삼존불 상(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과 명부전의 지장보살 불상이 국가 위기시마다 어김없이 땀을 흘린다는 것이다. 이 절의 주지인 지원스님의 말.

『지난 93년 송광사 주지로 부임한 이래 내 눈으로 부처님이 땀을 흘리는 것을 4번이나 목격했다. 대웅전의 아미타불은 96년 11월경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아군과 공 비가 사살되는 어지러운 시점에서부터 땀을 흘리기 시작하더니 지금도 가슴께가 표시나게 젖어 있어 심히 걱정스럽다. 이전에는 저런 현상이 없었는데 나라에 무슨 일이 일 어날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95년 말 노태우 전대통령 비자금 사건과 95년 6월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무렵에는 명부전의 지장보살상이 엄청나게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고 93년 10월 서해페리호가 변산 앞바다에서 침몰했을 때는 대웅전의 약사여래불이 눈물을 흘렸다. 희한한 것은 대웅전에는 똑같은 조건의 부처님 3분이 모셔져 있는데 눈물을 같이 흘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따로따로 흘리니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하기는 힘들다』

실제로 대웅전의 아미타불은 가슴부분이 흥건히 젖어 있었고, 나머지 석가불과 약사여래불에서도 물이 흐른 자국이 선명했다. 그리고 대웅전 옆 한 귀퉁이에는 87년부터 91 년까지 4차례 땀을 흘린 불상 사진과 날짜를 기입해 전시해 놓고 있었다.

이것을 표충비의 땀기록과 대비해보기로 하자. 만약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표충비건 불상이건 땀을 흘린다면 어느 정도 일치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다. 땀 을 흘린 역사나 기록수로 보자면 표충비가 월등하기 때문에 송광사 기록에 있는 날짜(총 8차례)를 표충비 날짜에 맞추어보고 이를 다시 당시에 국가적 사건 사고가 있는지를 검토해보는 방법을 취했다. 대조해본 결과 서로의 기록에서 어느 정도 일치성을 보여주는 것은 송광사기록 기준으로 5차례였고 나머지 3차례는 별 관계가 없었다. 한편으로 표충비에서 땀을 흘린 기록(밀양경찰서가 파악한 자료로 총 49건)을 죽 살펴보면 국가 중대사라고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되는 날짜도 없지 않았다.

 

독재정권에 대한 경고

마지막으로 사명대사 출생지를 훑어볼 생각으로 다시 밀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홍제사 표충비를 지나 무안면 중산리로 향하는 길목에서 표충비와 비슷하게 생긴 석비를 발견했다. 비석에 비각을 세운 것하며, 비석의 크기와 재질이 너무나 흡사해 호기심이 일어 차를 세웠다. 비문을 읽어보니 「송계 신선생 유적비」로 씌어 있었다. 마침 길을 지나가던 촌로가 있어 물어보았더니 자신은 평산 신씨(신용철씨·81)로 이 비석 주인공의 자손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비석은 세운 지 3년 된다. 그런데 어느날 비석을 살펴보다 물이 흐른 자국을 발견했다. 혹시나 싶어 사명대사비에 땀이 나는 날에 비석을 찾아보니 역시 똑같이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명대사비가 땀을 흘리는 것은 무안면의 지리와 기상학적 조건에서 발생하는 자연 현상이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신씨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확인하기는 힘들었다. 무안면사무소와 무안면 주민들을 상대로 이에 대해 문의를 해본 결과 『신씨 유적비에서 땀 흘린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며 그럴 리가 없다』고 강하게 부정했다.

결국 땀 흘리는 현상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되 그에 대한 의미 부여는 과학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임은, 사명대사 생가터 바로 앞에서 「덕명사」라는 조그만 절을 운영하고 있는 여보살을 우연히 만나면서 느낄 수 있었다. 「인덕화」라는 불명을 가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명대사를 모신 지는 4년째다. 그런데 이미 10년전에 선몽을 통해 사명대사 출생지를 보고는 무작정 길을 찾아나섰더니 여기가 바로 꿈에 본 그대로였다. 그래서 아 예 여기다 터를 잡고 살고 있다. 표충비에 가서 1주일 내내 기도를 하며 지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의 믿음 그대로 표충비에 사명대사의 혼령이 깃들여 있음을 여러번 실감했다. 비록 땀을 내는 것 자체는 자연과학적 현상이라고 해도 사명대사가 천기(天氣)를 통해 국가의 중대사를 암시한다고 받아들이면 국민 정서상 오히려 건강한 면도 있지 않겠는가』

사실 일제시대 우리나라를 지배한 일본인들은 말할 것 없고, 광복 이후 국민들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않은 권력자들은 표충비가 땀 흘리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껴왔다. 표충비를 관리하는 홍제사 스님들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 표충비에서 땀을 흘리기라도 하면 관리들이 외부에 발설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땀 흘린 양을 적게 해달라고 부탁해 오기도 했다』고 말한다.

이는 표충비가 정서적으로 독재자들에는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표식이었고, 독재정권에서 신음하는 일반 국민들에게는 하나의 카타르시스가 돼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땀 흘리는 표충비의 참된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안영배<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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